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에 대한 리뷰입니다.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독 : 션 베이커
출연 : 미키 매디슨, 마크 아이델슈테인, 유리 보리소프
줄거리
결코 이 사랑을 놓지 않을 것 뉴욕의 스트리퍼 ‘아노라’는 자신의 바를 찾은 철부지 러시아 재벌2세 ‘이반’을 만나게 되고 충동적인 사랑을 믿고 허황된 신분 상승을 꿈꾸며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꿨던 것도 잠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반’의 부모님이 아들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자 길길이 날뛰며 미국에 있는 하수인 3인방에게 둘을 잡아 혼인무효소송을 진행할 것을 지시한다. 하수인 3인이 들이닥치자 부모님이 무서워 겁에 질린 남편 ‘이반’은 ‘아노라’를 버린 채 홀로 도망친다. ‘이반’을 찾아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은 ‘아노라’와 어떻게든 ‘이반’을 찾아 혼인무효소송을 시켜야만 하는 하수인 3인방의 대환장 발악이 시작된다.
자발적 성노동자의 노동을 긍정하는 감독, 션 베이커
션 베이커 감독의 이름은 낯설지 모르지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은 대부분 긍정적일 것이고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엄마가 그러했듯 션 베이커 감독은 <레드 로켓>, <플로리다 프로젝트>, <탠저린>, <스타렛> 등 언제나 성노동자를 등장인물로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업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판단하는 영화 속 외부인들의 시선은 있을지언정, 그들이 하는 행동이나 그들의 선택에 있어서 그들의 직업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직업'이 성노동일뿐, 그들이 하는 생각들, 그들이 하는 행동들 모두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죠. 그런 부분이 아마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점일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갈등 상황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고 우리는 그들의 상황과 선택에 공감합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 션 베이커 감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이해하실 거예요. 션베이커 감독은 성노동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직업으로서 긍정하고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노라> 역시 성노동자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들과는 좀 다릅니다. 왜냐면 주인공 '애니(아노라)'가 일어나는 상황들이 애니가 성노동자라서 겪는 일이기 다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애니의 선택들이, 그리고 엔딩이 기존의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들과는 다른 미묘한 지점들이 생겨납니다. 또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의문이 듭니다. 이 영화는 '성노동자'를 긍정(인정)하는 영화인가?
'귀여운 여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21세기 현실판?
"매춘부가 재벌과 진정한 사랑에 빠져 신분상승한다." 이건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애니'는 러시아 재벌인 '이반'과 성노동을 통해 만나게 되고, 그러다 청혼을 받습니다. 과연 여기서 '애니'와 '이반'은 사랑에 빠진 것인가? 이건 영화를 직접 보셔야 할 거예요.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또 사랑에 빠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툭 터놓고 말해서 애니가 이반의 배경 없이 이반을 사랑한 것인가? 아니에요. 이반의 배경을 알고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사랑 없이 배경만 보고 좋아하는 거냐? 아니에요. 사람이 누구를 만나서 사랑하는 데 경제 수준이나 지적 수준, 외모 등이 전혀 사랑에 빠지는 데 영향을 안 준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니까 애니는 이반의 돈을 사랑하고, 이반이 자신을 진짜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반과 함께 지내는 게 즐겁고, 이반을 사랑할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그저 감정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완전무결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리고 애니의 이 선택이 진짜 사랑해서 한 선택이냐, 아니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한 번 보자고요. 그들이 무엇을 나누느냐? 시간을 나누고 돈을 나누고 파티를 나누고 섹스를 나눕니다. 그니까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 애니의 다른 면모, 외모나 '성'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건 제 편견일지도 모릅니다. 애니가 성노동자가 아니라면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요. 몽타주로 흘러나오는 애니와 이반의 일주일 시간이 애니가 성노동자가 아니라면 그냥 즐거운 시간을 보냈나 보다,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애니가 성노동자이기 때문에 애니의 그 어떤 인간적인 면모도 드러나지 않는 게 신경 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은 이반의 부모님이 알게 되면서 파탄 납니다. 이반은 그냥 애니를 버리고 도망가버리거든요. 사실 이 부분에서 애니는 자신을 드러냅니다. 건장한 남자들이 자신을 붙잡아도 끈질기게 버티고 저항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잡은 이 결혼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자신을 놓지 않아요. 기죽지 않고 버티고 어떻게든 이반을 설득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반의 부모님과 만났을 때 조차요. 하지만 이반이 찌질한 쓰레기라는 걸 깨달은 후엔 버티고 저항하려는 것을 포기합니다. 자신이 가졌던 '혹시(이반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다)'하는 기대가 허황된 꿈이란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니는 이반을 사랑했던 걸까요? 완전무결한 신데렐라만 왕자와 결혼할 수 있나요?
엔딩 장면은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든 걸 내려놓은 애니는 혼인무효에 동의하고, 자신을 잡으러 왔던 '이고르'와 함께 이반의 미국 집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여기서 애니는 이반과는 나누지 않던 '아노라'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반으로부터 돈을 받고 자신의 집으로 이고르와 함께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고르의 낡은 차 안에서 대망의 엔딩씬이 나옵니다. 이고르는 애니가 이반에게 결혼반지로 받았던 다이아 반지를 건네줍니다. 여기서 알 수 없던 표정을 짓던 애니는 이고르가 앉아 있는 운전석으로 넘어와 섹스를 시도합니다. 이 선택이 이 영화를 좋게 봐야 할지, 안 좋게 봐야 할지 헷갈리는 지점입니다.
감정적으로 애니의 이 선택은 '성노동자'로 살아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애니는 감정을 나누는 데 '성' 말고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여기서 애니의 행동에 관객들은 비참함을 느낍니다. 저 선택이 애니가 하는 최선임이 비참하고, 그런 선택을 한 스스로에게 비참함을 느끼는 애니의 눈물에 감정이 동합니다.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애니의 삶에 비애를 느끼고 슬픈 감정을 느낍니다. 마음이 아려오고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해석하자면 애니가 이고르에게 섹스를 시도하는 것이 애니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아노라'로서의 선택이라 할지라도 비참합니다.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돈을 받기로 약속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성관계가 아니라 감정에 동해서 낡은 차 안에서 나누는 성관계이기 때문에 성노동자 애니의 선택이 아니라 '아노라'의 선택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성노동자로서의 '애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를 받아서 섹스를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결국 그 관계를 가지면서 애니는 성노동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또 깨닫게 되는 것이며 스스로의 선택에 그런 비참함을 느끼는 것은 사회가 성노동자를 바라보는 인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엔딩씬은 또 다른 해석을 낳습니다. 여태까지 성노동자의 행동과 선택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성노동도 노동이라고 말하던 션 베이커가 마지막 엔딩에서 비참한 선택을 하는 성노동자를 만들어냈습니다. 성노동을 긍정하던 션 베이커가 마지막에 스스로 성노동을 긍정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만들어냈어요. 그러니까 결국 성노동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낸 겁니다. 이렇게 해석하자면 마지막 엔딩씬은 션 베이커가 지금껏 이야기하던 말들을 부정하는 꼴처럼 느껴져서 최악의 엔딩씬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저는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제가 읽은 션 베이커 감독은 인간을 쉽사리 판단하지 않고 그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인공들을 부정적이거나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게 두지 않거든요. 그런 션 베이커 감독의 시선이 주는 따뜻함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노라>라는 영화는 기존의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들과 달리 조금 당혹스러운 면들이 존재하는 영화입니다. '애니'를 바라보는 게 따뜻하게만 느껴지진 않거든요. 마지막 애니의 선택은 감정적으로 아리고 슬프지만, 스스로 비참하고 좌절감이 느껴지는 선택을 하는 건 따뜻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션 베이커 감독처럼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기존의 션베이커 감독의 영화들 중에 제일 안 좋게 봤기 때문에 별로지만, 이 상은 <아노라>에게 줬다기보다 션 베이커 감독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별점 ★★★☆ 나에겐 조금 낯선 션 베이커
👍 :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가 좋다면
관련 영화, 시리즈 추천
👉 션 베이커 감독의 이전 영화들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 <탠저린>, <스타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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