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 대한 리뷰입니다.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 줄리안 무어, 틸다 스윈튼
원작 : 시그리드 누네즈 『어떻게 지내요(What Are You Going Through)』
줄거리
유명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오래전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던 절친한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가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간다. 연락이 닿지 않았던 시간 동안의 안부를 묻고 서로가 처한 현재의 문제에 대해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중요한 순간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하는데…
낯설지만 아름답고, 비일상적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세계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는 어려운 이름을 가진 스페인 영화감독을 아시나요? 저에겐 너무나도 요상한 감독이기도 합니다.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나쁜 교육>, <귀향>, <브로큰 임브레이스>, <내가 사는 피부>, <줄리에타>, <페인 앤 글로리> 등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긴 필모그래피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영화를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최근 작품은 아니고 9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을 몇 개 보았습니다. 선명한 색채의 미쟝센이 돋보이는 그의 영화는 많은 매니아들에게 미적영감을 주기도 하였지만, 제가 본 몇 몇의 영화들에서 그의 작품은 '성'에 대한 다소 파격적인 설정과 뒤틀린 듯한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졌기에 낯설고 비일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자주 즐겨 감상하는 영화감독이 아니였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낯설고 요상한 세계에서 묘하게 아름다움을 느끼는 제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는 게 제 숨은 감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룸 넥스트 도어>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였다기에, 또 줄리안 무어와 틸다 스윈튼이라는 명배우들의 만남이었기에 호기심을 갖고 오랜만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세계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꾸안꾸 스타일의 툭툭 던지는 화법
영화는 '잉그리드'라는 소설가의 팬사인회에서 시작합니다. 거기서 갑자기 오랜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마사'라는 친구가 암에 걸려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죠. 그리고 잉그리드는 바로 마사에게 찾아갑니다. 마사를 만난 잉그리드는 오랜만의 재회에 옛날 이야기도 나누고, 만나지 못했던 기간동안의 이야기도 나눕니다. 마사는 종군기자로 살았고, 현재는 암에 걸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죠. 몇 번의 만남 이후 마사는 충격적인 부탁을 합니다. 본인의 삶을 자발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으니 그 옆에 있어달라고 말입니다. 잉그리드는 오랜만에 만난 마사의 부탁이 당황스럽고 꺼려집니다. 하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고 잉그리드는 마사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골의 어느 집에서 함께 지냅니다. 마사는 자신이 언제 죽는지 알려주진 않을 것이며, 자신의 옆 방에서 휴가 온 듯 지내다 자신이 죽으면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둘 만의 비밀로 하자고 말이죠. 그 시골 집에서 두 사람은 산책도 하고, 수영장 썬베드에 누워 바람을 느끼기도 하고, 동네 책방에서 책을 고르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며 일상을 보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역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답게 쨍하고 선명한 색채의 미쟝센이 돋보입니다. 영화 속에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직접 나오기도 하고, 마치 호퍼의 작품을 보는 듯한 장면들도 있습니다. 또한 굉장히 많은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 대화는 그들이 공유했던 삶과 공유하지 않았던 삶들의 이야기, 자신들의 취향 이야기, 연애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 평범한 대화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들, 책이나 소설 등의 언급들이 나옵니다. 꼭 이 모든 이야기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냥 그 삶을 공유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 됩니다. 굉장히 미쟝센에 신경쓰고, 대사에 신경쓴 듯 보이고, 반복되는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실은 별로 특별하진 않습니다. 물론 마사의 삶, 잉그리드의 삶의 이야기는 평범하지 않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자체가 아주 특별하진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경쓴 듯 보이지만 화면 전환이나 촬영, 연출 등도 툭 툭 던져집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으며, 툭툭 내던져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관객인 저는 몸에 힘을 풀고 귀기울여 듣게 됩니다. 툭툭 던진다는 게 무심하다는 것은 아니고, 꾸며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그들의 집, 그들이 입은 옷들, 그들의 대화, 그들의 몸짓 모두 당연히 꾸며진 것이지만, 감독은 억지로 그걸 그럴 듯하게 꾸미지 않고 보여줍니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다
그리고 잉그리드는 두려워하던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마사의 죽음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마사의 딸과 함께 마사와 함께 누웠던 썬베드에 누워 그 공기를, 바람을 느끼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저는 솔직히 '존엄사'에 대해 약간은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선택이 과연 옳을지, 그 선택이 정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일지, 이 '죽음'이란 것은 내가 감각하고 생각하는 이 세계 전부가 전복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선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죠. 과연 이런 나의 생각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룸 넥스트 도어>를 통해 어떤 영향을 줄지 기대와 반발심을 가지고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그런 생각은 얄팍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삶입니다. 그러면 마사의 죽음은 삶이 아닌가요? 마사는 언제나 일상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종군기자였습니다. 죽음의 경험, 그 일상들이 그녀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사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삶을 나눌 친구를 만났고, 그 삶을 나눴고, 자신의 인생을, 일상을 누렸습니다. 큰 사건없이 잔잔하게 스며드는 이들의 이야기는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도록 만들지도 않고, 그 죽음을 어떤 끔찍한 사건으로 다루지도 않고, 죽음으로 다가가는 마사의 고민이나 갈등을 무겁게 다루지도 않습니다. 그저 시골집에서 친구와 휴가를 보내며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삶을 정리하는, 또 다른 삶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어느새 스며든 그들의 대화는 죽음 역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입니다. '존엄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삶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 합니다. 죽음은 두렵고 피해야만 할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는 동행자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영화관은 까만 어둠이 잠깐 스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갔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고요해지는 그 평온이 곧 삶입니다.
별점 ★★★★ 호들갑 떨지 않고 고요하게 죽음을 긍정하는 일이 삶일지도
👍 : 페드로알모도바르 감독의 팬이라면/ 줄리안 무어와 틸다 스윈튼의 팬이라면/ '존엄사'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거장의 영화화법을 느껴보고 싶다면
관련 영화, 시리즈 추천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작 <페인 앤 글로리>/ 존엄사를 다룬 영화 <씨 인사이드>, <미 비포 유>, <죽여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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